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용자동차 사태 (문단 편집) == 진행 과정 == 2009년 5월 21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노조원들은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무기한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고 26일부터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 사무직, 연구원, 비노조 생산직 등]들의 평택공장 진입을 저지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은 내부에 본사, 연구소가 같이 있는 구조로, 정문을 통제할 경우 모든 업무가 마비된다.] 이에 사측은 5월 31일 오전 8시 30분 부로 [[노동쟁의#s-2.2|직장폐쇄]]를 강행했고 6월 8일[* 5월 8일 해고계획신고서 제출 후 30일이 지난 시점] 쌍용자동차 사측에서는 희망퇴직자를 제외한 976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6월 26일 노조가 "정리해고자 976명 가운데 2012년까지 200명 범위에서 무급휴직 및 우선 재고용하고 450여명에게 희망퇴직 기회를 주겠다"며 제안한 회사측의 구조조정 수정안을 거부하자 사측 직원들[* 사측 노동자와 경비 용역 회사직원들로 구성]이 공장진입을 시도했다. 사측 인원 3,200명이 기숙사 문과 철조망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장 안으로 진입하자 노조 측(820명)에서는 [[쇠파이프]], [[새총]], [[지게차]]를 이용해 진입한 사측인원들을 몰아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7/03/2009070300149.html|관련 기사]], [[https://www.youtube.com/watch?v=fhUmQ_n7JKw|동영상]]) 다음 날까지 사측은 본관 및 정문 주변에서 대기하고 노조 측은 도장 1·2공장 안팎에서 대기하면서 사측을 향해 대형 새총을 발사하고 [[화염병]]을 던졌다. 같은 시각 민주노총 등 470명은 정문 우측 주차장에서 구호제창을 하면서 노조 지원유세를 벌였다. 당일 22시 40분경 쌍용자동차 대표의 철수 성명서 발표 후 사측 직원들은 해산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쌍용차 용역1.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쌍용차 용역2.jpg|width=100%]]}}}|| || 6월 25일 사측 직원[* 회사측 경비 업체와 사측 노동자가 섞여 있는 모습으로, 일부 주장처럼 용역 경비업체 인원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들이 평택공장 진입을 시도하는 모습. || 26일 노사간 무력 충돌 이후 경찰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공권력을 투입하기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제기되었다. 7월 6일에는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으며 공권력 투입의 근거를 만들었고 11일에는 공장 주출입구를 비롯한 출입구를 확보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공장으로 들어오는 모든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한 채 차들을 검문해 금속노조 조합원들과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출입을 봉쇄했으며 평택 공장을 찾은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출입통제를 당했다.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출입통제를 받자 정문앞에서 파업에 참가하던 노동자들을 위한 농성을 이어갔는데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사측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노조측을 위한 지원시위를 저지하려 대기하던 경찰병력이 그들을 보호하게 되는 촌극도 발생했다. 이러한 경찰의 출입구 통제 과정에서 회사 측에서도 물과 음식물을 공장 내에 반입 못하도록 막으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https://m.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09080602019922732032|#]] 한편 경찰은 노조원들이 던지는 화염병 등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6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최루액 원액 2천 ℓ가 섞인 물 20만 ℓ를 살포했다. 특히 경찰 진압작전 중 최초로 헬기를 이용한 혼합살포가 이루어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ultoday.co.kr/1248052202-45.jpg|width=100%]]}}}|| || 7월 20일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노조원들이 [[걸프 전쟁|타이어에 불을 붙였다.]] || 7월 20일, [[수원지방법원]]은 평택공장을 회사 측에 인도하라는 강제집행명령을 내렸으며 [[경기도남부경찰청]](당시 경기지방경찰청)은 34개 [[경찰기동대|중대]] 3천여 명의 경력을 동원했다. 10시 10분부터 집행관, 변호사, 사측 직원 등 4명이 강제집행을 위해 3차례에 걸쳐 도장 2공장 앞으로 진출하려고 했으나 노조의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당일 오후 금속노조 등 500여 명은 정문 앞 공터에서 공권력 투입 규탄 기자회견을 가진다며 구호를 제창하다가 경찰의 해산절차가 진행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경찰은 방석막과 대형 그물망을 이용해 본관 정문 등 3개 장소에 9개 중대를 전진 배치시키고 노조를 압박했다. 한편 사측 직원 3,500명은 공장으로 진입한 뒤 본관 및 연구동에 대기하면서 정문 출입을 통제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ews/200906/30/ned/20090630181214982.jpg|width=100%]]}}}|| || 노조원들이 쇠파이프를 든 채 철조망 뒤에서 농성하는 모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쌍용차_평택.jpg|width=100%]]}}}|| || 7월 21일, 노조원들이 금속으로 거대 새총을 제작해 대형 볼트를 발사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경찰은 헬기로 공중에서 최루액을 살포했다. || 7월 24일, 노조원 600명이 도장공장·복지동 등에서 대기중인 가운데 그 중 170여 명이 도장 2공장과 오·폐수처리장 주변에서 화염병과 볼트를 투척하고 지게차[* 지게차에 프레임 등을 올려 '''사람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와 불을 붙인 폐타이어를 이용하여 경찰력 투입에 저항했다. 15시 경 경찰특공대 3개 제대와 4개 기동부대가 로디우스 차체공장에 진입해 그 일대를 장악하자 복지동 옥상에 있던 노조원들이 화염병을 투척하면서 저항했고 경찰은 화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헬기로 최루액 비닐 봉지를 투하하며 대응했다. 17시 경 노조원들이 차체 공장에 접근해 재차 방화를 시도하는 것을 재빨리 소화기로 진화하는 한편, 경찰 15개중대를 모든 출입문에 전진 배치시켰다. 한편 사측 직원 1,550여 명은 본관 주변에 대기하며 출근 준비를 했고, 노조원들이 농성을 해제하도록 설득방송을 실시했다. 7월 28일, 경찰은 진입을 포기하고 식량 및 물 반입을 막았다. 노조원 가족들과 몇몇 사회단체 소속 30여명이 물을 전달하려다가 사측 직원에게 가로막히기도 했다. 다음 날인 7월 29일 민주노총에서 물 전달을 위한 행진을 시도하고 경찰은 이를 저지했다. 8월 4일 경찰은 노조원이 체류하고 있는 주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26개 기동부대를 동원해 복지동과 조립공장으로의 진입을 시도했으나 노조 측에서 새총으로 볼트를 발사하고 카이런 차체공장 옥상에 시너를 뿌리고 방화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여 일시 후퇴했고 밤늦도록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8월 5일 아침 8시 경 경찰은 크레인에 연결된 컨테이너 박스 3개와 사다리를 이용해 동시에 조립공장 옥상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10시 경에는 경찰특공대[* 1985, 1987년 [[대우자동차]]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9040020921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9-04&officeId=00020&pageNo=11&printNo=20284&publishType=00020|파업]], 2000년 [[호텔롯데]] 총파업에도 [[http://na-dle.hani.co.kr/arti/issue/543.html|투입된 후]] 4번째다.]와 기동 부대원들이 헬기와 고가사다리차를 통해 도장 1공장 옥상에 진입했다. 이후 복지동 옥상과 카이런·렉스턴 차체공장을 순차적으로 확보한 가운데 사측 직원 3,000여 명은 도장1공장과 조립공장 자재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한편 12시부터 노조 측의 제안으로 노·사 대표는 본관 뒤 컨테이너 박스에서 실무교섭을 벌여 20시 경본관 대회의실에서 마침내 ‘노사 합의서’ 조인식을 개최하면서 77일간의 파업이 끝났다.[[https://m.khan.co.kr/national/labor/article/200908061821415#c2b|#]]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